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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녹나무의 파수꾼’은 기존의 미스터리 중심 작품들과는 결이 조금 다른 방향에서 출발해요. 살인 사건이나 치밀한 트릭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세대와 세대를 잇는 마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하는 작품이에요. 작가가 2020년대를 맞이하며 독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 가깝다고 느껴지기도 해요.
이 작품은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라는 다소 신비로운 설정을 바탕으로 하지만, 읽다 보면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인 인간 군상에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담백한 문체와 구성력이 살아 있으면서도, 전작들에 비해 감정선이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한 쪽으로 기울어 있어요.
막장 인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주인공 레이토는 말 그대로 인생의 바닥에 있는 인물이에요. 천애고아로 자라 무직 상태에, 절도죄로 유치장에 수감된 상황에서 이야기는 시작돼요. 미래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태의 청년에게 갑작스럽게 제안 하나가 들어와요. 변호사를 붙여 감옥에 가지 않도록 해줄 테니, 대신 시키는 일을 하라는 조건이에요.
이 제안을 받아들인 레이토 앞에 나타난 사람은 지금까지 존재조차 몰랐던 이모예요. 그리고 그녀는 레이토에게 ‘월향신사’에 있는 녹나무를 지키는 일을 맡겨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임무가 사실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역할이에요.
소원을 들어주는 녹나무라는 설정
레이토가 맡게 된 녹나무는 평범한 나무가 아니에요. 이른바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나무로 알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기도를 해요. 하지만 레이토가 지켜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간절한 기도와는 조금 달라요. 그 모습은 어딘가 조심스럽고, 또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풍겨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설정을 통해 ‘기도란 무엇인가’, ‘사람이 바라는 소원이란 무엇인가’를 자연스럽게 묻고 있어요. 단순히 무언가를 달라고 비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과거와 마주하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해요.
유미와의 만남, 그리고 진실을 향한 시선
이야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계기는 여대생 유미의 등장부터예요. 레이토는 순찰 도중 유미와 마주치고,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게 돼요. 유미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 녹나무에서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뒤를 밟아온 거예요.
레이토는 호기심과 어쩌다 보니 엮인 상황 속에서 유미를 돕게 되고, 이 과정에서 녹나무와 기도를 둘러싼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요. 이 부분에서 소설은 미스터리적인 호기심을 적절히 자극하면서도, 과도한 긴장감보다는 차분한 흐름을 유지해요.
세대와 세대를 잇는 이야기
‘녹나무의 파수꾼’이 인상적인 이유는 개인의 사연을 넘어서 세대 간의 연결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에요. 기후 변화, 노인 문제, 젠더 갈등, 빈부 격차, 세대 갈등 등 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작품의 배경으로 깔려 있어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에서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고 말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삶에는 분명 의미가 있고, 그 의미는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녹나무를 찾는 사람들의 사연 하나하나가 그 메시지를 조용히 증명해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또 다른 얼굴
히가시노 게이고를 미스터리 작가로만 알고 있다면, 이 작품은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비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작품을 좋아했다면, ‘녹나무의 파수꾼’ 역시 충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에요.
이야기는 화려하지 않지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요. 우리 주변에 실제로 있을 법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품은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읽는 내내 잔잔한 감정이 쌓여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즈음에는 큰 사건 없이도 마음 한쪽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게 돼요.
이런 독자에게 추천해요
자극적인 반전이나 빠른 전개보다는, 사람 이야기와 메시지가 담긴 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잘 맞아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세계를 조금 다른 방향에서 만나보고 싶은 독자에게도 추천할 만해요.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삶과 관계를 돌아보고 싶을 때 읽기 좋은 책이에요.
‘녹나무의 파수꾼’은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묻게 하는 소설이에요. 그래서 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