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죄, 그 사이에 선 가족의 이야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도 조용하지만 강렬한 울림을 주는 작품이에요. 범인이 초반부터 드러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다음부터 시작돼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죄와 사랑의 무게를 함께 느껴보세요.
“사랑은 때로, 가장 잔혹한 은폐가 되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붉은 손가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도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마음을 치는 작품이에요.
보통 가가 시리즈는 ‘범인은 누구인가’, ‘동기는 무엇인가’ 같은 전형적인 추리 구조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달라요. 범인은 초반부터 공개돼요.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처음엔 “그럼 남은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가나?” 싶은데, 이야기는 오히려 그 순간부터 시작이에요.
줄거리
어느 날, 평범해 보이던 전형적인 회사원 아키오의 집 앞의 정원에서 어린 소녀의 시체가 발견돼요. 아키오의 아들이 이 어린 소녀를 살해했고, 아오키는 자수를 하고자했지만, 아내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살인을 덮자고 해요. 결국 아키오가 시신을 수습해 공중 화장실에 버리고 옵니다. 정작 살인을 저지른 아들은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에만 몰두하는데도말이죠.
사건 다음 날, 수사는 시작되고 가가형사는 아키오의 집을 포함해 공원 주변의 동네를 탐문수사합니다. 사건의 단서가 될 만한 경찰의 유일한 증거는 몇 없지만 노련한 가가 형사는 범인의 추적에 박차를 가하고, 아키오 부부는 경찰의 압박이 점점 심해지자 결코 골라서는 안 될 최후의 선택지를 써내 들고야 맙니다.
사건과 세 가족
이야기의 중심에는 세 가족이 있어요. 가가 형사와 그의 아버지, 가가의 사촌 마쓰미야 가족, 그리고 사건의 중심이 되는 마에하라 아키오 가족이에요.
가가 형사의 가족은 겉으로는 단정하지만 속은 서늘한 가정이에요. 형사였던 아버지는 일에 묻혀 살았고, 어머니는 결국 집을 떠나면서 부자 사이는 멀어졌어요. 어릴 적 기억이 거의 없는 가가는, 그때부터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으로 자라난 것 같아요.
반면, 사촌 마쓰미야는 가가의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아 경찰이 됐어요. 그래서 그는 가가가 아버지와 거리를 두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요. 겉으로는 냉철하지만, 사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온 가족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마에하라 아키오 가족. 이야기의 비극은 바로 이 집에서 시작돼요.
이 가족은 남편 아키오, 아내 야에코, 중학생 아들 나오미, 그리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가 함께 살아요.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안은 완전히 무너져 있어요. 사랑도, 대화도, 배려도 없는 관계. 그저 의무감으로 함께 사는 가족의 형태일 뿐이에요.
“가족인데 왜 이렇게 서로를 모를까.” 읽다 보면 이런 질문이 절로 떠올라요.
범인은 초반에 등장하지만, 진짜 긴장은 그 후에 시작돼요
사건은 한 어린 소녀의 살인으로 시작돼요. 하지만 범인이 밝혀진 뒤에도 이야기는 멈추지 않아요. 이 가족이 왜, 어떤 이유로 이런 선택을 했는지를 가가 형사가 하나씩 파헤쳐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거든요.
마에하라 가족은 사건을 은폐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독자는 점점 답답함을 느껴요. 진실을 덮는 ‘붉은 손가락’이 상징하는 건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기합리화예요.
“붉은 손가락은, 사랑이 죄가 되는 순간을 상징하는 이야기예요.”
가가 형사의 시선
이 작품에서 가가 형사는 단순한 수사관이 아니에요. 그는 가족이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 들어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인 ‘붉은 먼지’를 털어내는 사람이에요.
이번 작품은 특히 가가 자신의 가족사와도 깊게 연결돼요. 그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고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는 장면들은 묘하게 먹먹해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을 이해한다는 건 무엇인가’를 묻고 있어요. 우리가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착각할 때, 오히려 그 거리감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줘요.
읽고 나면 남는 여운
'붉은 손가락'은 스릴 넘치는 트릭이나 반전 대신, 조용한 울림으로 독자를 붙잡아요. 읽는 내내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책을 덮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져요.
결국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거나 사랑으로 포장된 무관심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작품은 효심을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가가 형사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어요.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가 충분해요.
“붉은 손가락은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찾아가는 이야기예요.”
'붉은 손가락'은 가가 형사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화려한 트릭 대신 진심과 후회를 다루는 작품이죠.
읽는 동안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이 오래 남아서 결국엔 “좋은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제일 잘 아는 작가 같아요.
함께 읽으면 좋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 ‘악의’ – 인간 내면의 어둠과 관계의 왜곡을 다룬 대표작
- ‘용의자 X의 헌신’ – 희생과 사랑, 도덕적 딜레마를 다룬 수작
- ‘신참자’ – 가가 형사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수사극
